axis

힘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어떤 무언극
박순영 (노암갤러리 큐레이터)
작품들은 단순 명료하다. 보이는 대로 기계처럼 생긴 캔버스 평면에 가는 철사로 된 선 몇 가닥이 지나갈 뿐이다. 약간의 관심을 끄는 사실이 있다면 선의 중간지점이 살짝 끊겨져서 화폭 앞 공간에 간격을 두고 떠있다는 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과 선의 양끝이 자석으로 이루어져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자석놀이의 경험이 있다면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서 어찌 보면 그 흥미도 쉽게 사그라질지 모른다. 다만 좀 더 여유로운 관람자라면 왜 일반적인 캔버스가 아니고, 왜 자석을 작품에 사용하였는지 호기심을 가질 것이며, 나아가 왜 이러한 표현양식이 예술작품으로 전시장에 걸릴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것일지라도 관람자, 혹은 그 작가는 어떠한 식으로든 이렇게 작품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두께를 지닌 울퉁불퉁한 흰 화면 위 철사와 자석으로 이루어진 검은 선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단순하고 명료한, 말하자면 심플함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홍정욱은 오래전부터 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또는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를 고민해왔다. “힘과 균형, 힘의 관계 속에서의 역설, 공기에 대한 저항, 중력에 관한 저항... 내가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이 일상으로 생각하는 긴장감에 대한 저항을 정적인 상태로 표현하는 것과, 수학적인 요소로 황금분할을 이용하여 안정감과 동시에 변화가 일으키는 긴장이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는 양태를 표현하는 것, 그리고 자석을 물리적인 요소로 이용하여 균형상태에 놓여있는 힘의 역학관계를 표출시키는 것이다.” 1, 2회 개인전을 보면 처음에는 심리적 가치에 대한 관심에서 그랬고, 이후 물리적 가치에 대한 관심에서 그랬다.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관심. 하지만 예술이 표현해야 하는 것은 심리학이나 물리학이 표현하는 것과 달리 오로지 힘 자체이다. 말하자면, 어떤 지시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화면 안에서 작가에 의해 그려지거나 붙여지면서 드러나는 형상들의 자유로운 힘이다. 왜 힘을 표현하고자 하는지를 보기에 앞서, 우선 어떻게 힘을 표현하고 있는지, 그리고 힘이 표현되기 위해 화폭에 구성된 요소들이 무엇인지부터 봐야 할 것 같다.
홍정욱의 작품은 중력가속도 법칙을 근간으로 한다. 작품 는 우선, 잠재적인 것들로 가득 차있는 흰 평면을 가로좌표인 x축과 세로좌표인 y축으로 분할해서 보여준다. 중력가속도를 추상화한 y=x² 공식을 통해 x축의 화폭은 1,2,3...으로, y축은 1,4,9...의 변수 단위로 분할되어 있다. 화폭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는 앞으로 나타날 선, 혹은 형상을 위해 마련된 작품의 배경적 요소로서 흰 평면과 x, y축이다. 말하자면, 평면은 나타나기 이전의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카오스인 반면, x축은 카오스의 무한 속도를 한계 짓는 감속의 가로좌표로서 상수를 형성하고, y축은 카오스의 잠재적 형식을 현실화시키는 세로좌표로서 가로좌표와 함께 어떤 발원점을 이루는 좌표체계를 형성한다. 이제 가로좌표와 세로좌표가 만나는 지점에서 질료의 자격을 지닌 사물의 상태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사물의 상태는 좌표의 체계에서 분배되는 잠재력을 빌려옴으로서 카오스상태의 잠재적인 것들을 현실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사물의 상태는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이 현실화하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을 지시할 뿐인 과학적인 사물의 상태가 어떻게 사물로 현실화되는지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작품을 봄과 동시에 현실화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작품에 더 가까이 그래서 작품이전에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 즉 회화이전의 것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화폭을 구성하는 두 번째 요소는 잠재적인 것의 잠재력이 현실화된 선이다. 사실 잠재적인 것은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실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행되는 것은 힘으로서, 관념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이 힘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질료의 자격으로 표현되는 한, 특히 홍정욱의 작품에서처럼 일반적으로 어떤 형상이 드러나면서 나타나는 선이 아닌 한, 규정되거나 지시관계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인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의 순수한 감각존재를 추려내는 방식. 회화에서 선이 나타나는 것은 평면에 이미 존재하는 잠재적인 것들의 표현이다. 화가는 그 잠재력이 이끄는 대로 손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작곡가가 세계의 진동에서 음표를 찾아내주고, 발레리나가 진공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소설가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살아있는 대로 서술해주면 되듯이 화가도 자신의 몸을 화폭에 빌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홍정욱은 작품의 내재적인 선을 그 평면에서 띄워놓음으로써 더 어려운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되면 첫 번째 요소인 평면과는 다른 차원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띄어져 있기 때문에 붙어있다는 역설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작가의 독창성이다. 앞서 질료의 자격을 지닌 사물의 상태는 좌표체계를 이루는 어떤 발원점을 갖는다고 말했다. 화폭에서 떨어져있는 선은 axis, 즉 축의 어떤 발원점에서 솟아오른다. 이것은 탈주하는 선이다. 이제 잘 구성된 무대 위에서 어떤 무언극이 시작된다. 이것이 첫 번째 특징이다. 두 번째 특징은 선 자체가 지닌 힘을 선에서 표현하기 위해 선의 어떤 부분―아무 부분이든 상관없다―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선이 끊어진 채로 유지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차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화폭에 내재되어 있는 선을 표현하듯이 선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 선과 선을 이어주는 장치가 있는데, 작가는 끊어진 선의 사이―실제 우리가 사물과 맺는 관계도 그렇다―를 자석으로 이어주고 있다. 선이 고유하게 지닌 힘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작가는 자석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은 사실 사이를 갖지 않은 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제작된 선은, 선 사이가 넘나들 듯이, 또는 감각과 힘들이 넘나들 듯이 평면과 띄어져 있음으로써 상호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선의 제거된 부분에서는 선의 힘, 아니 우주의 환상적인 힘이 작용한다.
니체처럼, 혹은 클레처럼, 들뢰즈는 말한다. “힘은 감각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감각작용이 있기 위해서 힘은 몸, 즉 파동이 이는 장소 위에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힘이 감각작용의 조건이라고 해도, 그것은 감각되어진 것이 아니다. 감각은 자신의 조건인 힘으로부터 출발해서 힘과는 전혀 다른 것을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감각이 자기 자신 위로 충분하게 되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가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우리에게 준 것 속에서 포착하기 위해, 즉 어떻게 감각될 수 없는 힘들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완되거나 수축될 수 있으며, 자신의 고유한 조건들로까지 상승할 수 있을까?” 화가의 임무는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키는 것,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도래할 죽음에 대한 절규, 풍경의 열적인 힘, 또는 폭발하는 뉴욕의 비행기 등등... 홍정욱은 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회화와는 다른 방식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힘은 한편, 자신의 고유한 힘을 한없이 발휘하면서 긴장된 상태로 정지해 있는 힘으로서 균형, 공존, 적극성, 혹은 결백이다. 이런 측면에서 윤리학에 닿아있다. 다른 한편, 성질로 꽉차있는 빈 평면과 선의 잘려진 부분, 즉 보이지 않으면서 작용하는 힘으로서 감각-존재, 사이-존재, 살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상학에 닿아있다. 평면과 선, 그리고 선과 선이 서로 넘나들 듯이 홍정욱의 회화는 우리를 좀 더 깊고 좀 더 먼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