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한 두 축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
무엇이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가. 모더니즘의 대표적 비평가 그린버그는 물질성과 평면성을 회화의 본질적 속성으로 꼽았다.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든 그렇지 않든 특정한 내용과 주제를 전달하든 그렇지 않든 회화라면 모름지기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해야 하며 2차원의 평면에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의 범주 안에서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 역시 여전히 이 두 가지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그러한 매체적 본성을 강령으로 삼거나 위반하는 것에 작업의 목적을 두지 않으며 매체를 기준으로 한 범주구분을 우선시하지 않을 뿐이다. 홍정욱의 작업은 회화로부터 출발하였다.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성과 평면성 둘 중 하나만을 가진 것은 회화인가 아닌가, 즉 캔버스에 물감이 칠해졌지만 평평하지 않거나 평면이지만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회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의 시각적 구현이 홍정욱의 초기 작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후 일련의 진화를 거쳐 그의 작업은 회화라는 범주구분의 의미 자체를 무화시키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바로 그 방식으로 말이다.
회화의 물질성과 평면성처럼 홍정욱의 작업 전반에는 상이한 두 개의 축이 공존하고 모든 작품은 그러한 두 축 사이의 한 지점에 놓인다. 이차함수 그래프의 x축과 y축 사이 한 좌표처럼 모든 작품은 서로 간의 관련성 하에 공존하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먼저 중심이 되는 것은 형식상의 축이다. 기존 회화의 사각 프레임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 제작해 캔버스 천을 씌우고 아크릴 물감을 칠한 그의 대표적 작업인 <-↑g=↓9.8(㎨)>과
영국 유학 이후 현재까지 근 5년간의 작업들을 통해서 작가는 이러한 형식상의 범위를 확장하고 다양하게 변주해내기 시작했다. 회화와 조각 사이 어딘가에 위치했으나 일차적으로 벽에 걸린다는 점에서 회화의 축에 가까웠던 작업들이 재료와 형태의 측면에서 그 범위를 크게 확장하면서 조각 혹은 설치의 축에 가까이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재료 면에서는 카드보드, 포맥스, 각종 와이어, 플라스틱 호스, 아크릴 막대, 케이블 타이, 플라스틱 태그, 실리콘 캡 등 미술재료가 아닌 일상의 사소한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재료들 각각을 작가가 전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접합하고 연결하는 점, 선, 면의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작품마다 적합한 재료를 선택해, 점을 모아 선과 면으로, 선을 쌓아 면으로, 짧은 선을 연결해 긴 선으로, 작은 면을 붙여 큰 면으로 만들어 가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냈다. 각 단위를 연결해 작품의 뼈대를 완성하고 그 단위가 작아질수록 전체적인 형태는 곡선의 유기체 형상에 가까워지고 구 혹은 정육면체와 같은 입체형태로 바닥에 놓이는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는 단순한 재료와 보여주는 방식의 변화뿐 아니라 작업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좌표 변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캔버스 프레임의 방향과 간격을 조정하는 보다 단순한 형태의 이전 작업들은 작가의 수학적 계산과 계획, 그에 따른 통제라는 ‘이성적’ 축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물론 당시에도 작업의 전체적 인상과 기획은 작가적 직관에 따른 것이었으나, 재료와 형태의 범위가 확장된 최근 작업으로 오면서 작가는 자신의 손맛과 직관, 우연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비이성적’ 축에 보다 가까워졌다. 이번 전시의
그러나 이러한 최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홍정욱의 작업은 대체로 단일한 색과 복잡하지 않은 형태로 인해 ‘단순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을 알고나면 그러한 인상이 실체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에 탄복하게 된다. 모든 재료를 깎고 자르고 갈아서 붙이고 매달고 덮는 전 과정에서 공장에 맡기거나 기계를 사용하는 단 하나의 공정도 없다. 나무나 포맥스로 작품의 전체 뼈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수 백 개의 택(tag)이나 케이블 타이(cable tie)를 일일이 매달고, 수 십 개의 아크릴 막대와 철사의 단면을 원하는 각도로 갈아서 부착하는 것까지 모두 전적으로 작가의 손에 달려있다. 심지어 보관과 운송을 위한 나무상자까지 손수 만드는 작가의 모습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원시 부족사회의 브리콜뢰르(bricoleur)와 꼭 닮았다. 브리콜뢰르가 주변 사물들을 손에 닿는 대로 가져다가 원래의 쓰임과 상관없이 새로운 쓰임새의 물건을 만들어낸다면, 홍정욱은 완성될 작품의 드로잉을 가지고 실질적인 쓰임새와는 무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복잡한 제작과정과 극도의 물질적 노동이 그와 상반된 간결한 최소한의 형태를 낳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홍정욱의 작업은 예술의 무용성(useless)을 극대화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이 가져오는 역설이 작가의 가장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실체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작업의 주제나 내용과도 맞닿아있다. 작가는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실들을 작품을 통해 가시화하고자 한다. 예컨대 그가 오랜 시간 몰두해 온 ‘중력(gravity)’이라는 소재는 평소에 인지할 수 없지만 시간과 장소와 무관하게 지구상의 모든 존재에 작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작가는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번 전시의 <-by> 역시 중력을 이용한 작품이다. 캔버스 아래로 내려와 있는 와이어는 실제 사각형이 아니지만 캔버스에 매달렸을 때 중력에 의해 사격형처럼 보이도록 계산된 형태이며, 3개의 모서리만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지각의 습성에 따라 사각형으로 인지된다. 한편 이 작품의 푸른색 캔버스는 사실상 단색이 아닌 48가지색의 무수한 점이 겹쳐져 푸른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외양과 실재의 차이를 보여준다. 많은 작품에서 작가는 이렇듯 외양 너머의 실재, 현상 너머의 실체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홍정욱은 점, 선, 면과 원형, 삼각형, 사각형이라는 형태를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물들이 기본적으로 원형, 삼각형, 사각형의 세 가지 형태 혹은 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러한 모든 형태는 결국 면으로 이루어지며 면은 선의 결합으로, 선은 점의 연장으로 형성된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작업 전반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장의 중앙벽에 벽드로잉과 함께 설치된 작업
이렇듯 홍정욱의 작업에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여러 쌍의 상이한 축들이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된다. 그리고 각 작품은 그러한 두 축들 사이의 한 지점에 놓인다. 그것은 회화와 조각, 이성과 직관, 현상과 실체, 인공과 자연, 당기는 힘과 미는 힘, 노출과 폐쇄, 약한 재료와 강한 구조 등 흔히 공존하기 어려운 특징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신혜영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