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LL
조형의
진화론
시작은 가느다란 선(線)에서부터였다. 캔버스에 대고 직접 선을 긋는 대신, 철사를 구부려 캔버스 위에 살짝 띄워 보았다. 정면에서 보면 흰 바탕에 검은 선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조명을 비추면 그림자가 지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철사가 진동하였다. 길게 늘어뜨린 선일뿐이었는데, 이와 마주한 공간이 홀연 존재를 드러냈다. 홍정욱이 첫 개인전 《ball of line》(갤러리 룩스,
2003)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이다.
지난 십여 년간 그 모습은 바뀌어 왔으나, 홍정욱의 작업은 줄곧 조형성과 세상의
원리에 대한 집요한 탐구였다. 그에게 선이란 조형의 근본이자 세상을 감지하는 안테나의 역할이었다. 캔버스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철사로, 캔버스 안쪽에 팽팽하게 당겨진 요철로, 때로는 LED 전구의 광선(光線)으로 뿜어져 나온 작품의 선은 공간으로 뻗어 나와 외부의 세계와 조우하였다. 공간(空間),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이었기에, 그의 작품이 놓이면 공기로만 가득 찬
줄 알았던 전시장이 작품의 리듬에 따라 또렷이 구획 지어지고, 여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하여 옮겨놓은 듯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실제로도 홍정욱은 중력가속도, 십이진법과 같은 물리 법칙과 수학 원리를 적용하여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규칙성마저 번거로운 사족인 양 서술적인 설명을 줄이고 더욱 기본에 천착하고 있다.
그의 새 개인전 《INFILL》은 선에서 나아가, 선이 구부러져 만들어내는 형태의 기본 요소인 삼각, 사각, 원을 변주한다. 조형예술의 근본을 직시하려는 시도이다. 전부 2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는데, 전시의 도입부에서는 최근 1~2년 사이에 창작한 작품을 중심으로,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비교적 구작과 신작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홍정욱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선의 기능이 최소화되고, 다채로운 색상과 면이 빚어내는 구조가 전면에 드러나 이제 그의 작업 세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실 홍정욱이 보여주어 온 예리한 공간 설치를 기대하고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적잖게 당혹스럽기도
한데, 회화전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평면적으로 보이는 단색조의 작품이 화이트 큐브의 곳곳에 놓여 있다. 이전에도 종종 그의 작품은 회화로 분류되거나 ‘회화적’으로 읽히곤 하였다. 이는 그의 작업이 캔버스로 만들어지고 못 몇 개 정도로
벽에 걸 수 있을 만큼 간결한 형식이기에 연유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덩어리 자체의 양감이나 물성보다는 작품이 공간에 놓이면서 만들어지는
테두리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품에서 뻗어 나온 선은 어떻게 주변과 이어지고 끊어지는지, 작품의 요철이 만들어내는 음영은 어떻게 새로운 면을 만들어 가는지, 또 각각의 선과 면이 충돌하며 공간의
지각을 어떻게 확장하는지가 관심사였는데, 그래서 홍정욱에게 공간이란 180° 또는 360°로 둘러진 백지(白紙)이고, 그가 만드는 작품은 어느 각도에서라도 비스듬히 바라볼 수 있는 그림과도 같아 보였다. 이리저리 여러 방향에서 전체 공간을 헤아리며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지만, 한결같이 드로잉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주변 환경과의 조응 속에서 완성되어 갔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과거 선으로 포착되었던 날카로운 촉각이 색면의 형태로 완만히 수렴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외부 세상과 연결된 선이 하나도 없이 오로지 면으로만 구성된 작품도 있는데, 변형된 반구 모양의 〈○○○〉의 일부나 바닥에 놓인 〈INFILL〉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특히 〈INFILL〉 연작에서는 전면에 고운 색상이 칠해져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작품의 뒷면에 칠해진 물감의
형광색이, 눈에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공간으로 배어 나오며 선 대신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러면서 작품의 존재 양식도 바뀌어 갔는데, 가령 중력가속도를 다루었던 초기작 〈-↑g= ↓9.8(㎨)〉만 하더라도 홍정욱의 작품은 공간과 힘겨루기 하며 에너지를 확산·분출했던
데 비해, 최근의 작품은 그 에너지의 방향이 내부로 응축되어 개별성을 갖추어 가고 있다.
동글동글하고 단단하게, 작품이 제각각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서식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전시장 깊숙한 곳의 한 코너에 설치된 흰색 표면의 〈INFILL〉은 마치 벽면의 중턱에 뿌리를 박고 기생하는 겨우살이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 자신도 본인의 작업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
같다며 자평(自評)을 하는데, 그가 기본으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그의 작품은 새로운 종(種)으로서
내적 완결성을 획득해 왔다. 그 모양새만 하더라도 이번 전시에 출품된 〈avi-neuron〉(2005)이 미생물이나 단세포 생물의 원시적인 형태를 닮았다면, 삐죽삐죽 바깥으로 철사를 내어 보이는 〈common〉(2008)은 바깥으로 촉수를 뻗고 있는 해양 생물처럼 보이며, 바닥에 설치된〈INFILL〉(2017)은 튀어나온 선 하나 찾아볼 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육지 동물처럼 스스로 우뚝 서 있다.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그의 작품이 점점 유기체의 진화처럼 변화하는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할 수 없는데, 자연의 패턴만큼 세상의 근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앵무조개나 해바라기의 씨앗에서도
피보나치의 수열을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기본은 현상의 이면에 내재하여 있기에 그것이 작품에서 발현된다 하여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홍정욱 작품의 실루엣은 삼각, 사각으로 더 단순화되어 왔지만, 그 내부 구조만큼은 전작(前作)을 만들면서
거쳐온 실험의 과정을 포함하는 복잡한 요소로 구축되어 있다. 형태에서 군더더기의 요소를 제거해나가며 보다 압축적이고 심오한 사고와 구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데, 이 과정이 영락없이 조형의 진화이다. 이때 작품을 어디에서 보아도 똑, 떨어지게끔 하는 깔끔한 디테일의 기저에는
홍정욱의 지난한 수공(手工)이 뒷받침하고 있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나무판면의 못 머리를
매끈하게 사포질을 한다거나, 자작나무 합판 사이에 볼펜 선보다도 가는 색을 넣어서 손톱만한 크기의 구슬을 만들거나, 전선 하나도 허투루 늘어뜨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논리뿐만 아니라 제작의 방식에 있어서도 기본에 충실한 작가의 태도이다.
선에서부터 면으로, 흑백에서 색채로 조금씩 나아가며 조형의
원리를 찾아가는 홍정욱에게 창작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데카르트는 “가장 단순한 것을 복잡한 것에서 구별하고, 순서적으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사물의 각
계열에 있어, 즉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한 진리를 다른 한 진리에서 연역한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단순하고, 또 다른 것들이 이것에서 얼마나 더, 덜 혹은 같은 정도로 떨어져 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조형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해하여 재조합하는 홍정욱의 작품은 이처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질서를 세우는 탐색자의 행보와도 같다. INFILL, 새로운 연작의 작품명이자 이번 전시의 제목처럼 그의 작품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색일까 면일까 공간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채우는 것은 오히려 조형 자체의 논리이자 조형의 자율성이다. 생명을 갖춘 유기체처럼, 내부의 원동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쩌면 조형예술가로서의 기본이 아닐까. 우리는 그 기본조차 너무 잊고 지내온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것이 홍정욱의 작품을 주목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김소라 (OCI미술관
큐레이터)
The Evolution Theory of Forms
It began from a very thin line. Instead of drawing lines directly onto canvases, the artist had bent wires and set them floating slightly above the canvas. When they were faced from the front, they were the same black lines on white backgrounds, but when light shined on them, shadows were made, and, along with the flow of the air, the wires shook, delicately. Although they were merely lines that had been put hanging long, the space they encountered, suddenly, revealed their presences. These were the works which Hong, Jung-Ouk had presented at his first solo exhibition 《Ball of Line》(Gallery Lux, 2003).
In the past decade, Hong’s works have changed in their appearances, however, all the while, they have been persistent inquiries on the formativeness and the principles of the world. To the artist, line was the basis of forms, which also played the role of an antenna that detects the world. Made with a wire sticking out of the canvas, with a bump, stretched tightly inside the canvas, or sometimes, with a ray of an LED light bulb, the line of the works reached out into space and has met with the outside world. As they were lines that crossed literally the space ‘in between spaces’, when the artist’s works are placed, the exhibition room, which one would have thought it had been filled with air, only, clearly divides into sections according to the rhythm of the works, and there even flows a lot of tension in the air, as though it had captured some kind of an invisible force and moved it there. Hong had actually even made pieces by applying the law of physics and the principles of math such as the acceleration of gravity and the duodecimal system. However, recently, as if to say that such regulations, too, are unnecessary comments, the artist reduced descriptive explanations, seeking more on the basics.
The artist’s new solo exhibition, 《INFILL》, goes beyond the line, playing with variations of triangles, rectangles and circles, the basic elements of shape. It is an attempt to look straight into the basis of the formative arts. All together, about 20 pieces of artworks are in display; at the introductory part of the exhibition, it centers on works that had been created in past 1 to 2 years, and at the latter half, relatively old works and new works are being merged together. In this exhibition, the line, which, all the while, played a crucial role in Hong’s works, is minimized, the structure, brought about by diverse colors and planes, unfolds all over, enabling us to assume that, now, his art world has taken a new turn.
As a matter of fact, had one entered into the entrance of the exhibition room, expecting a keen installation of space which Hong had always shown, it can be quite confusing; there are monotone pieces, which seem flat to the extent that one would be mistake for it being a painting exhibition, placed all about the white cube. Even in the past, his works have, at times, been classed as painting or, sometimes, have been read as ‘painterly.’ The reason may have come from the fact that his works were made with canvases and were in forms so concise that they could be hung up on the wall with just a couple of nails, but above all, it was because his works had focused on the edges that were created whilst they had been placed in space, rather than the volume or the property of the mass per se. The way in which the line, stretched out of the work, connects and disconnects with its surroundings, the way in which the shadow created by the bump of the work forms a new plane, or, the way in which each lines and planes collide to expand the perception of space were the matters of concern, and so, it seemed that to Hong, space is a blank paper bound in 180° or 360°, and the pieces he make are like paintings that can be viewed from whichever angle. Although they are works that must be appreciated, thinking about the whole space from all sorts of different angles, they all possess the property of drawing, and they become complete within accordance with the surrounding environment.
However, in this exhibition, one can discover that the sharp sense of touch, captured by the line in the past, is gently converging into color planes. Furthermore, there are pieces made up of planes, only, without a single line connecting to the outside world; A part of <○○○>, in the shape of a modified hemisphere, or the piece such as , placed on the floor, are representatives. Especially in the series, a fine color is painted on the forepart, but also, more than that, the fluorescent color, painted on the backside of the works, softly transuding into space, demonstrates its presence instead of the line. Whilst this was happening, the style of works’ presence also changed over time, for instance, compared to an earlier work, 〈-↑g= ↓9.8(㎨)〉, where Hong’s work had spread and vented energy, fighting against space, in recent works, the direction of energy is condensed towards the inside, beginning to form and possess individuality.
The pieces each seem to inhabit, becoming independent entities, in rounds and solids, and of white surface, installed at a corner, somewhere deep in the exhibition room, looks like a mistletoe that is parasitic, embedding its root halfway up the wall. Sure enough, the artist himself self-evaluates, saying, he believes that his work is not ‘developing’ but ‘evolving’ ; the more he went back to the basics, his works acquired an inner integration as a new species. Even if one was to look merely at the appearance, (2005), which is in display in this exhibition, resembles the primitive shape of a microrganism or a unicellulate, (2008), which shows a wire sticking in the open, looks like a marine organism that is stretching its tentacle outside, (2017), installed on the floor, appears to be sleek without a line popping out in sight, and it is standing eminently by itself like a land animal. The fact that the artist’s works gradually changed in accordance with the chronological order, like the evolution of organisms, cannot be considered to be a mere coincidence because nothing implies the origin of the world more than the patterns of nature. As one can find the Fibonacci numbers even in a nautilus or a sunflower seed, because the basics lie inherent inside, had it be manifested through artworks, one would not be surprised. Moreover, along with the passing of time, the silhouette of Hong’s work had become more simple, in triangles and rectangles; however, the interior structure, to say the least, is built with complicated elements that include the process of experimentation, undergone whilst making the prior artworks. As it eliminates the superfluous elements from the forms, it proceeds towards a more compact, yet profound thinking and composition, and this process is infallibly the evolution of forms. At this point, from whichever way one looks at the works, the foundation of details that make them look neat is backed up by Hong, Jung-Ouk’s next-to-impossible handicraft. It is things like sanding off the head of the nails that intersect the wooden board plane at a right angle, making a bead the size of a fingernail by inserting a color thinner than a line of a ball-point pen in between the silver birch plywood, or, not allowing a single electric wire carelessly hanging about, which is not only the logic constituting the work, but the artist’s attitude, faithful to the basics, even when it comes to the method of production.
Slowly going from a line to a plane, from black and white to color, to Hong, Jung-Ouk, who is searching the fundamentals of forms, creation is a process of searching truth. Descartes states, “In order to distinguish the simplest things from those that are complicated and to set them out in an orderly manner, we should attend to what is most simple in each series of things in which we have directly deduced some truths from others, and should observe how all the rest are more, or less, or equally removed from the simplest,” and Hong’s work, which dismantles and recombines the elements of forms, one by one, is like the steps of an investigator who, in this way, sets orders in order to understand the world. Like the name of the new series of works, which is also the title of this exhibition, 《INFILL》, I wonder, what his works are filled with? I think carefully: Is it color? Is it plane? Or is it space? But what fills his art world is, if anything, the logic of the form itself, as well as the autonomy of forms. Like organisms with life, to confirm the driving force inside is, perhaps, the basics of a formative artist. I think we may have forgotten about those basics, even, for too long. That is precisely why we must pay more attention to works of Hong, Jung-Ouk.
Sora Kim (Senior curator, OCI Museum of Art)